그리고 개구라선동 맞아요 (2008년부터 아직까지 광우병 피해가 없을뿐더러 2018년에는 미국 쇠고기 수입 1위...)
PD수첩이 가짜뉴스 퍼트려서
그거에 혹한 사람들이 촛불시위, 폭력시위 일으켰죠
폭력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냐면
경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 상관없는 625사진전마저 불태웠을 정도였으니까...
광우병은 선동이라고, 촛불시위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인터넷에, 현실속에서 하기만 해도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돌림 당해서 좌우 대립이 더욱 격렬해지기도 했죠
분명히 과도한 진압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전 광우병이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를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봐요
[@rlackdgus]
미국산 소 수입에 연령제한을 걸었으면 그런 보도가 나갈 일이 없었겠죠
당시 전세계가 광우병 예방차원에서 연령제한으로 수입제한을 걸어놨었는데, 우리나라만 무제한으로 여니 공포감이 느껴질 수 밖에요
완벽히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소에 제한을 걸었던 다른 선진국들도 선동당했던 거라고 말하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이웃나라인 일본만 봐도 안전성 때문에 원래 기준보다 더 안전한 기준으로 제한을 걸었던 상황이었는데, 그걸 제한없이 우리나라에 들여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호구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개선해 기르고 있었다고 해도 아직 안전하다는게 완벽히 검증이 됐던 때가 아니었으니 막아야 하는게 맞지요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지요
동시에 당시 상황 다 무시하고 현재 안전성이 검증되었다고 그때 당시로 소급해 신념 어쩌고 하면서 사람들을 매도하는 것도 무서운 겁니다
[@gottabe]
6월 19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님의 대국민 담화에서
"저는 미국 부시 대통령에게 우리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를 계기로 지금 이 시각에도 양국 대표들이 모여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한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할 것입니다. 미국 정부의 확고한 보장을 받아내겠습니다. 미국도 동맹국인 한국민의 뜻을 존중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식품의 안전성을 담보하기 위해 철저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한도 걸었고, 끝난겁니다
허나 그 이후로도 폭력시위는 계속됐습니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총집결 지침을 내린 6월 28일, 1만5000명이 서울 태평로 전(全) 차로를 점거하고 집회를 벌였다. 6000여명의 시위대 중 일부는 쇠파이프를 휘둘러 경찰 차량을 부쉈고, 인근 빌딩 소화전과 소방호스를 이용한 '사제(私製) 물대포'를 경찰에 쏘아대며 세종로 진출을 시도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3000여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공격을 계속했다. 해산 작전에 투입된 306중대와 50중대 대원들은 시위대에 순식간에 '돌돌말이'로 포위돼 쇠파이프와 돌, 망치, 의자 등으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70여명의 경찰 대원이 실신하거나 피를 흘렸지만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이날 하루 동안만 166명의 경찰이 다쳤다. 이젠 제대해 사회인이 된 당시 전·의경들은 그때를 '악몽'으로 기억했다." 2010.05.11자 조선일보 기사 중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1/2010051100174.html
[@rlackdgus]
무슨 의도로 기사를 긁어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답변을 한번 해볼께요
30개월 미만 소 수입철회를 하겠다고 발표하기까지 한달 반이 걸렸고, 20번에 가까운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평화시위에 맞서 경찰이 곤봉 휘두른게 한두번이 아니었고, 폭력시위를 조장하기 위해 경찰들을 시위대에 끼워넣기도 했었죠
그런데, 그런 내용은 메이저 언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고, 촛불시위가 폭력시위라는 기사들이 갑자기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탄력을 받았는지 정부는 소고기 제한없이 수입하는거 풀 생각 없다고 말해왔었죠
그렇게 평화시위에 깽판치고 찬물 끼얹고 있던거 인터넷으로 실상이 계속 드러나면서 점점 더 많은 국민들이 거리로 나오게 된겁니다
그렇게 한달 반의 긴 싸움 끝에 정부가 30개월 이상 연령 소고기 수입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고, 그렇게 국민들 감정은 잦아들었죠
그런데, 하나가 더 남았었습니다
바로 소고기 수입을 저지하기 위한 농민시위입니다
농민시위는 늘 강경했으니 일반 시민들이 주도했던 시위와는 달랐죠
지금 그걸 가지고 광우병 시위 전체가 폭력시위였고, 선동이었다고 하시려는건 아니겠죠?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님은 시위 초기 때 촛불 켜놓고 노래 부르면서 앉아만 있던 사람들한테 우루루 달려 들어가 방패로 찍고 곤봉 휘둘렀던 경찰들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경찰은 행진할 경우를 대비하여 집회현장 전체를 차벽으로 둘러 차단하였고 오후 8시가 되면 해산 경고 방송을 했다. 당시엔 야간 옥외집회를 집시법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시위가 불법이냐 아니냐는 바로 이 야간 옥외집회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하지만 "당시까지는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5월 24일부터 촛불집회는 서울 도심의 주요도로를 점거하는 가두시위로 변했으며, "불법폭력시위 양상을 보였다." 최초의 폭력사태는 5월 24일. 열린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제17차 촛불문화제에서 밤새도록 해산하지 않고 남아있던 250여명의 시위대가 다음날 새벽 4시경 해산과정에서 충돌하여 경찰에 대한 폭력행위로 37명이 연행되었다.
5월 29일 농림수산식품부가 행정안전부에 ‘미 쇠고기 수입에 대한 장관고시 관보 게재’를 의뢰한 이후부터는 시위대가 청와대 진출을 시도하면서 이를 제지하는 경찰을 폭행하거나 차단선으로 설정한 경찰 버스를 손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5월 31일 밤, 시위대가 경찰의 차단선을 뚫고 청와대 부근인 내자・적선 사거리와 동십자 사거리까지 진출하여, 경찰을 폭행하고 차벽을 훼손하는 등 또 다시 폭력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은 청와대로의 집단진출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물포를 사용하였다.
6월 19일 대통령의 사과 기자회견과 함께 미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추가협상이 타결되는 등 정부의 대처로 폭력시위에 대한 반대여론이 고조되었으며, 정권퇴진 투쟁에 입장을 달리하는 시민들의 참여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러자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소위‘48시간 릴레이 투쟁’을 벌이면서 경찰버스 방화를 시도하는 등 집회 열기 회복을 위해 다시 불법폭력시위를 벌였다.
6월 25일 장관 고시 의뢰가 발표되자 내자 사거리에서 이를 반대하는 기습시위가 벌어졌으며 26일 아침 9시 관보 게재에 따라 협상의 효력이 발효되자 일부 시위대가 이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하면서 밤을 새워가며 폭력시위를 벌였다.
6월 28일 새벽에는 시위대 1,500여명이 태평로를 점거하면서 경찰장비를 손괴하고 경찰을 포위・감금하여 무차별 폭행하였으며, 특정 언론사 시설을 공격하고 경찰 부상자 수송까지 방해하는 등 촛불집회 개최 이후 가장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촛불시위에 대해 긍정적인 기업과, 무대응하거나 미온적인 기업들을 나누었다. 전자는 삼양식품, Daum, 한경오, 미디어오늘, MBC 등이었고, 후자는 삼성그룹, 농심그룹, 롯데그룹, 조중동, KBS, 네이버 등을 지목하였다. 후자는 조중동 계열 및 그들의 대형 광고주이다. 이들은 우호기업은 촛불시민들이 힘을 합쳐 밀어주고, 혐오기업은 망하게 하자라는 여론을 형성했다.
이전에는 시위대의 규모가 워낙 커서 방어위주 진압을 하거나 새벽/아침 무렵 진압/해산을 시작했으나 이 때부터는 시위진압 시각도 당겨지고, 그 강도도 훨씬 높아졌다. 시위대에 일반 시민은 사라졌고 "대부분 불법폭력시위를 목적으로 한 사람들로 가득했으며, 내부에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이용하는 세력이 등장하기도 했다."'
'5월 24일 첫 가두시위를 벌인 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촛불시위는 폭력의 강도가 더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고시 발표 시점에 시작한 ‘72시간 릴레이 투쟁(6. 5~8)’, 대통령 기자회견 이후 시민 참여가 감소하자 집회 열기 회복을 위한 ‘48시간 릴레이 투쟁(6. 20~22)’, 재협상 고시 발표 이후 이에 반대하는 폭력시위(6. 25~29) 등 특별한 이슈에 따라 집중 투쟁일을 선정하여 폭력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대는 청와대를 직접 타격 대상으로 삼아 5월 24일 이후 지속적으로 청와대 진출을 시도하였으며, 경찰이 청와대 접근로를 차단하기 위해 경찰버스를 이용하여 차벽을 설치하자, 비교적 차벽 설치와 차단이 어려운 골목길 등을 통해 청와대 방면으로 집단진출을 시도하였다. 청와대 진입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경찰버스에는 밧줄・와이어 등으로 걸어 당겨 끌어내거나 망치・쇠파이프 등으로 차량을 손괴하고, 방화를 시도하였다. 또한 타이어를 손상시키거나 주유구에 불순물을 투입하여 차량의 기능을 심각하게 훼손하기도 하였다.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대원들을 끌어내거나 고립시켜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폭행하고 대치중인 경찰을 향해 돌과 물병을 투척하는 한편, 물총에 까나리 액젓과 식초를 섞어 발사했다. 소화전에 호스를 연결하여 경찰에게 살수하기도 하였으며, 새총으로 쇠구슬을 발사하고, 염산이 들어있는 박카스병을 투척하는 경우도 있었다. 쇠파이프, 밧줄, 와이어, 망치, 각종 공사자재, 염산병, 횃불, 새총, 물총, 식초,까나리액젓, 돌, 페인트, 모래주머니, 스티로폼, 휴대용 방패, 우의, 안전모 등 불법 시위용품을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준비하여 사용하였으며 경찰버스나 대원에게서 탈취한 경찰 장비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두부 출혈 등 부상을 당한 경찰을 후송하기 위해 진입하는 119 구급차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승용차를 타고 시위현장을 지나가던 시민이 경적을 울리자 강제로 하차시킨 후 프락치라고 주장하며 억류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사장에서 철근 등 공사자재를 무단으로 반출하여 시위용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현행범을 검거하려는 경찰관을 ‘무고한 시민을 불법 체포했다’며 오히려 불법체포의 현행범이라며 경찰관을 억류하고 폭행하기도 했다.
특정언론사에 대한 반대시위도 매우 심하였다. 동아일보 사기(社旗) 게양대에 쓰레기봉투를 매달고, 조선・동아 등 언론사 건물에 돌・흙・화분을 던져 유리창을 파손하거나 건물 안에 오물을 투척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시위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들을 에워싸 폭행하고 취재장비를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
안재철 월드피스밀레니엄파크 건립위원회 위원장의 주도로 청계광장에서 6.25 사진 전시회에선. 6월 25일 전시된 사진 일부에 낙서가 되거나 걷어차이는 등 훼손시도가 일어났으며, 이틀 뒤 6월 27일 새벽에는 극좌 성향의 일부 시위대가 사진 130점 중 90장을 불에 태우는 사태가 일어났다. 관계자는 광우병대책회의 고소를 하였다.
[@주클럽]
아니 모질아 ㅋㅋㅋ 꼬우면 네가 치매환자 전수조사 해보던가
그래, 연령제한 걸었지
덕분에 상대적으로 안전해졌어
그런데 시위가 없어졌나?
6월 19일 추가협상이 일어났고(나이제한 걸었지, 이제 끝?), 6월 28일에 또 폭력시위를 일으켰어
경찰들 수도 없이 다치고, 부상자 수송까지 방해하더라
그냥 그 사람들은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폭동을 일으키고 싶었을 뿐인거야
예를 좀 이상하게 들자면 (생각나는 게 이것밖엔 없네)
박사모 틀딱들이 박근혜 사면 시위를 하는데,
그 덕에 박근혜가 사면됐어. 그런데도 계속 폭력시위를 하면서 사회를 어지럽히는거야
지가 대통령 되니 그대로 써 먹었구만
재앙이도 지내입맛에 맞게 언론부터 인사까지 다 만들고 지내말에 조금이라도 토달면 쳐내고....
어떻게된게 이나라에정권만 잡으면 다 이난리냐
뭐가 정답인지 모르지만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이제 내가 대통령일때 다른당 쳐내지않으면 내가죽는다.
라는 개념이 만들어진거같음
2008년이었나 ?광화문에 100만명 나가서 촛불들고 그렇게 싫다싫다 했으면 안하는게 맞는거지 벌레새키야.
그걸 갖다가 여중생들도 곤봉으로 쳐 때려잡고, 유모차에다까지 물대포 뿌리고 최루액 뿌리는게 정상이냐 틀딱 벌레새끼야?
시간 지났다고, 개구라치면서 여론몰이 하려고 해도
그 현장 목격한 사람들 아프리카 방송까지 해서 수천만 될텐데
공부못하고 취업못해 키보드나 두들기고 있는 일퀴벌레 대가리로 그게 되겠냐??
졸라 주제넘네 틀딱 노인 일퀴벌레새키들 주제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님도 틀딱같으신데...
그리고 개구라선동 맞아요 (2008년부터 아직까지 광우병 피해가 없을뿐더러 2018년에는 미국 쇠고기 수입 1위...)
PD수첩이 가짜뉴스 퍼트려서
그거에 혹한 사람들이 촛불시위, 폭력시위 일으켰죠
폭력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냐면
경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 상관없는 625사진전마저 불태웠을 정도였으니까...
광우병은 선동이라고, 촛불시위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인터넷에, 현실속에서 하기만 해도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돌림 당해서 좌우 대립이 더욱 격렬해지기도 했죠
분명히 과도한 진압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전 광우병이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를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봐요
당시 전세계가 광우병 예방차원에서 연령제한으로 수입제한을 걸어놨었는데, 우리나라만 무제한으로 여니 공포감이 느껴질 수 밖에요
완벽히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소에 제한을 걸었던 다른 선진국들도 선동당했던 거라고 말하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이웃나라인 일본만 봐도 안전성 때문에 원래 기준보다 더 안전한 기준으로 제한을 걸었던 상황이었는데, 그걸 제한없이 우리나라에 들여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호구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개선해 기르고 있었다고 해도 아직 안전하다는게 완벽히 검증이 됐던 때가 아니었으니 막아야 하는게 맞지요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지요
동시에 당시 상황 다 무시하고 현재 안전성이 검증되었다고 그때 당시로 소급해 신념 어쩌고 하면서 사람들을 매도하는 것도 무서운 겁니다
"저는 미국 부시 대통령에게 우리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를 계기로 지금 이 시각에도 양국 대표들이 모여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한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할 것입니다. 미국 정부의 확고한 보장을 받아내겠습니다. 미국도 동맹국인 한국민의 뜻을 존중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식품의 안전성을 담보하기 위해 철저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한도 걸었고, 끝난겁니다
허나 그 이후로도 폭력시위는 계속됐습니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총집결 지침을 내린 6월 28일, 1만5000명이 서울 태평로 전(全) 차로를 점거하고 집회를 벌였다. 6000여명의 시위대 중 일부는 쇠파이프를 휘둘러 경찰 차량을 부쉈고, 인근 빌딩 소화전과 소방호스를 이용한 '사제(私製) 물대포'를 경찰에 쏘아대며 세종로 진출을 시도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3000여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공격을 계속했다. 해산 작전에 투입된 306중대와 50중대 대원들은 시위대에 순식간에 '돌돌말이'로 포위돼 쇠파이프와 돌, 망치, 의자 등으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70여명의 경찰 대원이 실신하거나 피를 흘렸지만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이날 하루 동안만 166명의 경찰이 다쳤다. 이젠 제대해 사회인이 된 당시 전·의경들은 그때를 '악몽'으로 기억했다." 2010.05.11자 조선일보 기사 중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1/2010051100174.html
30개월 미만 소 수입철회를 하겠다고 발표하기까지 한달 반이 걸렸고, 20번에 가까운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평화시위에 맞서 경찰이 곤봉 휘두른게 한두번이 아니었고, 폭력시위를 조장하기 위해 경찰들을 시위대에 끼워넣기도 했었죠
그런데, 그런 내용은 메이저 언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고, 촛불시위가 폭력시위라는 기사들이 갑자기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탄력을 받았는지 정부는 소고기 제한없이 수입하는거 풀 생각 없다고 말해왔었죠
그렇게 평화시위에 깽판치고 찬물 끼얹고 있던거 인터넷으로 실상이 계속 드러나면서 점점 더 많은 국민들이 거리로 나오게 된겁니다
그렇게 한달 반의 긴 싸움 끝에 정부가 30개월 이상 연령 소고기 수입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고, 그렇게 국민들 감정은 잦아들었죠
그런데, 하나가 더 남았었습니다
바로 소고기 수입을 저지하기 위한 농민시위입니다
농민시위는 늘 강경했으니 일반 시민들이 주도했던 시위와는 달랐죠
지금 그걸 가지고 광우병 시위 전체가 폭력시위였고, 선동이었다고 하시려는건 아니겠죠?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님은 시위 초기 때 촛불 켜놓고 노래 부르면서 앉아만 있던 사람들한테 우루루 달려 들어가 방패로 찍고 곤봉 휘둘렀던 경찰들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경찰은 행진할 경우를 대비하여 집회현장 전체를 차벽으로 둘러 차단하였고 오후 8시가 되면 해산 경고 방송을 했다. 당시엔 야간 옥외집회를 집시법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시위가 불법이냐 아니냐는 바로 이 야간 옥외집회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하지만 "당시까지는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5월 24일부터 촛불집회는 서울 도심의 주요도로를 점거하는 가두시위로 변했으며, "불법폭력시위 양상을 보였다." 최초의 폭력사태는 5월 24일. 열린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제17차 촛불문화제에서 밤새도록 해산하지 않고 남아있던 250여명의 시위대가 다음날 새벽 4시경 해산과정에서 충돌하여 경찰에 대한 폭력행위로 37명이 연행되었다.
5월 29일 농림수산식품부가 행정안전부에 ‘미 쇠고기 수입에 대한 장관고시 관보 게재’를 의뢰한 이후부터는 시위대가 청와대 진출을 시도하면서 이를 제지하는 경찰을 폭행하거나 차단선으로 설정한 경찰 버스를 손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5월 31일 밤, 시위대가 경찰의 차단선을 뚫고 청와대 부근인 내자・적선 사거리와 동십자 사거리까지 진출하여, 경찰을 폭행하고 차벽을 훼손하는 등 또 다시 폭력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은 청와대로의 집단진출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물포를 사용하였다.
6월 19일 대통령의 사과 기자회견과 함께 미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추가협상이 타결되는 등 정부의 대처로 폭력시위에 대한 반대여론이 고조되었으며, 정권퇴진 투쟁에 입장을 달리하는 시민들의 참여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러자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소위‘48시간 릴레이 투쟁’을 벌이면서 경찰버스 방화를 시도하는 등 집회 열기 회복을 위해 다시 불법폭력시위를 벌였다.
6월 25일 장관 고시 의뢰가 발표되자 내자 사거리에서 이를 반대하는 기습시위가 벌어졌으며 26일 아침 9시 관보 게재에 따라 협상의 효력이 발효되자 일부 시위대가 이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하면서 밤을 새워가며 폭력시위를 벌였다.
6월 28일 새벽에는 시위대 1,500여명이 태평로를 점거하면서 경찰장비를 손괴하고 경찰을 포위・감금하여 무차별 폭행하였으며, 특정 언론사 시설을 공격하고 경찰 부상자 수송까지 방해하는 등 촛불집회 개최 이후 가장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촛불시위에 대해 긍정적인 기업과, 무대응하거나 미온적인 기업들을 나누었다. 전자는 삼양식품, Daum, 한경오, 미디어오늘, MBC 등이었고, 후자는 삼성그룹, 농심그룹, 롯데그룹, 조중동, KBS, 네이버 등을 지목하였다. 후자는 조중동 계열 및 그들의 대형 광고주이다. 이들은 우호기업은 촛불시민들이 힘을 합쳐 밀어주고, 혐오기업은 망하게 하자라는 여론을 형성했다.
이전에는 시위대의 규모가 워낙 커서 방어위주 진압을 하거나 새벽/아침 무렵 진압/해산을 시작했으나 이 때부터는 시위진압 시각도 당겨지고, 그 강도도 훨씬 높아졌다. 시위대에 일반 시민은 사라졌고 "대부분 불법폭력시위를 목적으로 한 사람들로 가득했으며, 내부에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이용하는 세력이 등장하기도 했다."'
'5월 24일 첫 가두시위를 벌인 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촛불시위는 폭력의 강도가 더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고시 발표 시점에 시작한 ‘72시간 릴레이 투쟁(6. 5~8)’, 대통령 기자회견 이후 시민 참여가 감소하자 집회 열기 회복을 위한 ‘48시간 릴레이 투쟁(6. 20~22)’, 재협상 고시 발표 이후 이에 반대하는 폭력시위(6. 25~29) 등 특별한 이슈에 따라 집중 투쟁일을 선정하여 폭력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대는 청와대를 직접 타격 대상으로 삼아 5월 24일 이후 지속적으로 청와대 진출을 시도하였으며, 경찰이 청와대 접근로를 차단하기 위해 경찰버스를 이용하여 차벽을 설치하자, 비교적 차벽 설치와 차단이 어려운 골목길 등을 통해 청와대 방면으로 집단진출을 시도하였다. 청와대 진입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경찰버스에는 밧줄・와이어 등으로 걸어 당겨 끌어내거나 망치・쇠파이프 등으로 차량을 손괴하고, 방화를 시도하였다. 또한 타이어를 손상시키거나 주유구에 불순물을 투입하여 차량의 기능을 심각하게 훼손하기도 하였다.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대원들을 끌어내거나 고립시켜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폭행하고 대치중인 경찰을 향해 돌과 물병을 투척하는 한편, 물총에 까나리 액젓과 식초를 섞어 발사했다. 소화전에 호스를 연결하여 경찰에게 살수하기도 하였으며, 새총으로 쇠구슬을 발사하고, 염산이 들어있는 박카스병을 투척하는 경우도 있었다. 쇠파이프, 밧줄, 와이어, 망치, 각종 공사자재, 염산병, 횃불, 새총, 물총, 식초,까나리액젓, 돌, 페인트, 모래주머니, 스티로폼, 휴대용 방패, 우의, 안전모 등 불법 시위용품을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준비하여 사용하였으며 경찰버스나 대원에게서 탈취한 경찰 장비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두부 출혈 등 부상을 당한 경찰을 후송하기 위해 진입하는 119 구급차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승용차를 타고 시위현장을 지나가던 시민이 경적을 울리자 강제로 하차시킨 후 프락치라고 주장하며 억류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사장에서 철근 등 공사자재를 무단으로 반출하여 시위용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현행범을 검거하려는 경찰관을 ‘무고한 시민을 불법 체포했다’며 오히려 불법체포의 현행범이라며 경찰관을 억류하고 폭행하기도 했다.
특정언론사에 대한 반대시위도 매우 심하였다. 동아일보 사기(社旗) 게양대에 쓰레기봉투를 매달고, 조선・동아 등 언론사 건물에 돌・흙・화분을 던져 유리창을 파손하거나 건물 안에 오물을 투척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시위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들을 에워싸 폭행하고 취재장비를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
안재철 월드피스밀레니엄파크 건립위원회 위원장의 주도로 청계광장에서 6.25 사진 전시회에선. 6월 25일 전시된 사진 일부에 낙서가 되거나 걷어차이는 등 훼손시도가 일어났으며, 이틀 뒤 6월 27일 새벽에는 극좌 성향의 일부 시위대가 사진 130점 중 90장을 불에 태우는 사태가 일어났다. 관계자는 광우병대책회의 고소를 하였다.
반대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시위대 몇 명이 중상을 입어 국가가 배상하기도 하였다.'
2008년 당시 상황을 경험하셨다면 나무위키나 보수언론 기사를 긁어오는걸로 답변을 대신 하지는 않겠죠
당시 님이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이 느껴졌으면 했는데..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 하는게 맞는 것 같네요
좋은 하루 되시길
그리고 니가 우리나라 치매환자들 전수조사라도 해봤냐?
그래, 연령제한 걸었지
덕분에 상대적으로 안전해졌어
그런데 시위가 없어졌나?
6월 19일 추가협상이 일어났고(나이제한 걸었지, 이제 끝?), 6월 28일에 또 폭력시위를 일으켰어
경찰들 수도 없이 다치고, 부상자 수송까지 방해하더라
그냥 그 사람들은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폭동을 일으키고 싶었을 뿐인거야
예를 좀 이상하게 들자면 (생각나는 게 이것밖엔 없네)
박사모 틀딱들이 박근혜 사면 시위를 하는데,
그 덕에 박근혜가 사면됐어. 그런데도 계속 폭력시위를 하면서 사회를 어지럽히는거야
한달내로 처형시켜버리자
븅신새끼들 노무현이 먼저 이명박 사찰했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