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도시에서 창궐한 역병의 기록인 카뮈의 <페스트>에서 종교는 한 축을 담당한다. 본래 종교를 찬양하는 고전은 드물고 적어도 대부분 종교에 회의적인 시선이지만, 실존주의 작가 카뮈에게 역병을 맞이한 종교야말로 본질적 의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파늘루 신부는 치밀하게 구성된 소설에서 종교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오랑에서 역병이 창궐하기 시작할 때, 많은 청중 앞에서 그는 신의 대변자로서 이렇게 연설한다.
"여러분들은 이제야, 마침내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와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 진리란 하나의 명령입니다. 구원으로 가는 길은, 여러분을 그곳으로 밀어주는 붉은 창입니다. (...) 선과 악, 분노와 연민, 페스트와 구원을 마련하신 하느님의 자비가 마침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재앙이 도리어 여러분을 향상하고,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모든 고민 속에 가로 놓인 저 영생의 황홀한 빛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곳은 확고하게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시는 신의 뜻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또다시, 죽음과 고뇌와 아우성의 길을 통해서, 그 빛은 우리들을 본질적인 침묵으로 이끌어 가며, 모든 생명의 원칙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광대무변한 위안입니다. (...) 페스트는 본래 신이 내리신 것입니다."
이 발언은 그 자체로 생명의 원칙과 선의를 언급하고 있지만, 역병이 신의 의지라는 사고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카뮈는 파늘루 신부를 단순히 현실과 괴리된 무책임한 인물로 그려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는 신의 입을 빌린 가장 현실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방역을 담당하는 보건대에서 활약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역병이 창궐한 오랑에서 신앙은 곧 시들해지고 그의 목회장은 비어가고 만다. 역병을 맞이해 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이유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신의 노력과 믿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 때문이다.
역병과 종교는 역사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의학이 불완전했던 시기에 종교는 대부분 필요악이었다. 페스트로 사람들이 죽어가자 기독교는 역병이 신의 심판이라며 면죄부를 팔았고, 결국 전 유럽으로 번진 종교 개혁의 발단이 되고 말았다. 기도가 역병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며 온 마을 사람이 모여 목회를 열고 떼죽음을 당한 기록도 많다. 광신도들이 결성한 속죄단은 그 정점이다. 신의 징벌에 맞서 참회하겠다고 고행을 자처하며 마을을 돌아다니던 집단은 그 자체로 감염 확산의 훌륭한 수행자였으며, 결국 대다수가 질병으로 쓰러지자 도적떼처럼 변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지날 때마다 문을 걸어 잠갔다. 종교와 역병의 충돌은 과학이 불완전할 때 필연적인 것이었다.
역병과 전쟁처럼 많은 이들의 생명이 사라질 때, 인간은 늘 신의 존재의 의문을 던졌다. 카뮈는 이를 직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일하게 신을 믿었던 판사의 어린 아들을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인다. 페스트에 감염된 연약한 아이는 오들오들 떨면서 경련과 전율로 흔들거리다가, 살이 완전히 다 녹아 버린 듯한 두 팔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듯한 괴상한 자세로 죽는다. 파늘루는 마지막 순간 "하느님이시여, 제발 이 어린애를 구해주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이 기도는 무용했다. 의사 리외는 이성을 잃고 그에게 소리친다.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그 죽음을 목도하고 가장 크게 변화하는 것은 역시 파늘루 신부다. 이미 한산해진 교회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연설한다. "그 어린애를 기다리는 영생의 환희가 능히 그 고통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준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습니까." 시작부터 그가 이제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리외는, 이 말을 듣고 이제 그가 이단자가 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파늘루는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여느 때와 같은 것일 수 없으며, 모든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설교한다. 그리고 어린애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들에게 쓴 빵과 같으며, 그 빵 없이는 우리들의 영혼은 정신적인 굶주림으로 죽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청중은 소란스러워진다. 파늘루는 예방책과 현명한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또 사랑을 강조하며 설교를 마무리 짓지만, 이어서 다른 부사제가 숙명론에 근거한 제목의 논문을 쓰고 있음이 밝혀진다. "신부가 의사의 진찰을 받는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연설을 마친 파늘루 신부는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채 방에 돌아와 앓기 시작한다. 죽음에 이르는 선열이 그에게 찾아오지만 신부는 마지막까지 의사의 진찰을 거부한다. 카뮈는 결국 파늘루 신부마저도 극도의 고통으로 잔인하게 죽이고 만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 십자가를 쥔 그에게 페스트의 징후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루 몇 백 명이 페스트로 죽어가는 소도시에서, 신부는 하필 페스트가 아니라 '병명 미상'의 질병으로 외롭게 죽는다. 카뮈는 왜 신부를 페스트로 죽이지 않았을까. 그 또한 신의 섭리를 표현한 것이지 않을까. 그렇게 역병이 창궐한 소설 안에서 종교는 종말을 맞이한다.
2.
나는 7일과 14일, 전공의가 모두 떠난 응급실에서 밤 근무를 섰다. 응급실에서 의사에게 주어진 모든 업무를 모두 전문의가 수행해야 했다. 그중에는 당연히 코로나에 맞서는 일도 있었다. 14일 당직에서는 이전 근무와 지침이 조금 달라졌다. '발열', '호흡기 질환', '해외 방문', '접촉력'에 '기독교'가 추가되었다. 음압실에 들어간 환자에게 나는 전화를 걸어 물었다. "당신은 교회를 방문했거나 기독교를 믿으십니까?" "아니요.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폐렴 여부를 확인해야 격리를 해제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만을 역병에서 자유롭다고 판단해야만 했다.
과중된 업무로 대단히 고된 밤이었다. 집에 돌아오자 체중이 줄어들어 있을 정도였다. 혼곤하게 귀가하는 길, 나는 부슬비가 내리는 광화문을 지났다. 갑자기 교통 체증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인파를 이룬 사람들이 다양한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유로워 보였다. 너무 많은 사람이 밀접하게 모여 있어서 한편으로는 무서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코로나 사태가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 나는 이 역병이 당분간 끝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어차피 바이러스는 계속 우리와 함께 할 것이고, 의료진은 앞으로도 방역 지침에 준해 일해야 한다. 덕분에 의료계는 모든 유증상 환자를 검사하거나 접촉자를 추적해서 격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로써 사태는 한동안 안정적이었다. 사람들은 다소간 자유롭게 활동했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방역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집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퇴근 후 술집에서 술 한 잔을 나눌 자유, 카페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싸우는 것이라고. 거기에는 종교와 집회의 자유 또한 포함된다. 실상 나 또한 의료계 집회를 위해 후배들을 모두 보내고 남아 당직을 서고 돌아오는 길이 아니던가.
3.
하지만 나는 단잠을 자고 일어나서야, 내가 간밤에 음압실에서 격리하고 질문을 던져야 했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 집회에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뛰어넘는 완벽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었다. 무자비하게 인간이 죽어가는 역병의 시대를 지나자 종교는 자연스럽게 위세를 잃었다. 지금의 종교야말로 역병에 맞서 직접적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올해 초 특정 종교의 대규모 감염 사태처럼 위험 인자로서 작용했다. 하지만 그들이 <페스트>에서처럼 종말을 맞이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리고 신에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거꾸로 과학이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나는 현대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의학이 어떤 수준까지는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내가 일선에서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방비는 어디까지나 사회 구성원의 상식적 행동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의 톱니바퀴만 빠져나가도 우리는 방역에 실패한 나라들과 다르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역병의 시대에서도 종교나 집회의 자유는 어느 정도 허용할 수 있다고 믿으며, 종교인이 정치적 발언을 할 수도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들이 생명을 담보로 위험하고 몰상식한 거래를 하는 것까지는 납득할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그들을 위해 싸우고 싶지 않다. 그들을 위해 절제된 삶과 무더운 방역복을 견디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가 퇴근하며 광화문에서 본 사람들은 모조리, 또다시 버텨내야 할 잠재적 환자들이었다.
종교는 어디까지인가. 아니, 일부 종교인의 몰상식은 어디까지인가. 종교는 본디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랑에서 출발했다. <페스트>의 시대에서조차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구원할 방법을 찾다가 종말을 맞이한다. 몇몇 목회자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종교란 그야말로 과학의 보이지 않는 비호 아래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로 타락해버린 셈이다. 집회에 모인 대다수의 죄 없는 사람들과, 이제부터 퍼져나갈 바이러스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부터 과학은 신을 믿는 인간 전부를 감염자로 취급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그들이 원한 것이고, 또 신이 바라던 일인가. 적어도 내가 아는 신은 무능할지언정 인간을 구원해야 한다고 믿는 존재다. 신은 집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이 고통받는 장면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행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카뮈가 묘사한 종교의 종말은 현대에서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한 것이다. 애써 지탱해온 평화는 깨졌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힘이 빠져 항거하기 어려운 기분이다.
- 의사 남궁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xinsiders
핵심요약
방역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집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퇴근 후 술집에서 술 한 잔을 나눌 자유,
카페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싸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내가 일선에서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이런 자유를
의학이 어떤 수준까지는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방비는 어디까지나 사회 구성원의 상식적 행동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의 톱니바퀴만 빠져나가도 우리는 방역에 실패한 나라들과 다르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일부' 종교인의 몰상식은 어디까지인가.
집회에 모인 대다수의 죄 없는 사람들과, 이제부터 퍼져나갈 바이러스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행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그들을 위해 싸우고 싶지 않다.
그들을 위해 절제된 삶과 무더운 방역복을 견디고 싶지 않다.
애써 지탱해온 평화는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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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코로나 걸려서 일찍 구원받아 천국 갈 생각인가?
감염병을 퍼트려놓고 천국에 갈수 있을거라 생각하나?
진보한 인류라 불리는 현 시대의 인간중에도 상상도 할수없을 정도로 무지하고 멍청한 인간이 있다는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네